slowloop 블로그를 만들 때 한 가지 결정을 했다.
데이터베이스를 쓰지 않겠다.
처음엔 기술적 결정처럼 보였다. CMS 세팅이 귀찮고, DB 운영 비용이 아깝고, 마크다운으로 충분하니까. 근데 실제로 쓰다 보니 이게 단순한 기술 선택이 아니었다. AI와 협업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선택이었다.
“블로그 관리를 따로 DB 안 쓰고 LLM으로만 관리하려고 하는데, 문서의 메타데이터나 인덱스가 이 정도면 될까?”
이 질문을 했을 때, 답이 “된다”로 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됐다.
왜 텍스트 구조가 AI 협업에 유리한가
DB가 있으면 AI가 구조화된 API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쿼리를 짜야 하고, 스키마를 알아야 하고, 변경할 때마다 마이그레이션이 필요하다.
텍스트 파일만 있으면 달라진다. AI가 그냥 읽으면 된다. 파일을 열고, 내용을 보고, 수정하고, 저장한다. 추가 레이어가 없다.
export/slowloop/
├── content-drafts/ # 작업 중인 글
│ ├── series-map.md # 전체 시리즈 현황
│ └── *.md # 초안 파일들
├── blog/ # 발행본 KO
│ └── 시리즈명/*.md
└── blog_en/ # 발행본 EN
└── 시리즈명/*.md
AI가 이 구조를 이해하는 데 설명이 필요 없다. 파일을 열면 전부 보인다.
실제로 가능해진 것들
전체 콘텐츠 현황 파악
series-map.md 하나에 전체 시리즈 목록, 아크 현황, 각 편 상태, 번역 여부가 다 들어 있다.
AI가 이 파일 하나를 읽으면:
- 지금까지 몇 편이 있는지
- 어떤 시리즈가 있고 각각 어디까지 왔는지
- 다음에 써야 할 편이 뭔지
- 번역이 안 된 게 뭔지
전부 파악한다. 대화가 끊겨도 이 파일을 읽으면 다시 맥락이 잡힌다.
한영 자동번역
글 하나를 쓰면 blog/ 폴더에 KO 버전, blog_en/ 폴더에 EN 버전이 같이 만들어진다. AI가 번역한다. 사람이 번역 커미션을 낼 필요도, 번역가를 구할 필요도 없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텍스트 구조다. DB라면 번역 레코드를 따로 만들어야 하고, 연결 관계를 관리해야 한다. 파일이면 그냥 복사해서 번역하면 된다.
대상 독자가 한국어 기반이지만, AI 번역으로 영어도 병행 제공한다는 게 처음부터 기획에 있었다. 별도 비용 없이 가능한 건 이 구조 덕분이다.
문서 자동 참조·연결
발행된 글은 references: 필드로 다른 글과 연결된다. AI가 초안을 쓸 때 이 링크를 따라 관련 내용을 읽고 반영할 수 있다.
/blog-publish 단계에서는 발행된 전체 코퍼스를 스캔해서 연결 가능한 글들을 자동으로 찾는다. 내가 직접 “이 글이랑 저 글이랑 연결해줘”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wiki가 블로그의 소스이고, 블로그가 wiki의 발행본이 되는 구조. 텍스트 파일이니까 AI가 양쪽을 모두 읽고 연결할 수 있다.
솔직한 단점도 있다
이 구조가 좋은 점이 많은데, 쓰다 보면 한계도 보인다.
정합성이 떨어진다. AI가 여러 파일을 관리하다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생긴다. 같은 사실이 A 파일에는 이렇게, B 파일에는 저렇게 쓰여 있는 것. 사람이 일일이 교차 확인하지 않으면 잡기 어렵다. DB라면 한 곳에서 관리되니까 이런 문제가 없는데, 파일이 분산되어 있으면 어쩔 수 없다. 이 문제가 환각으로 나타났던 경험은 이 편에서 다뤘다.
틀린 부분을 채우기 힘들다. AI가 만든 글에 오류가 있으면 수정하는 게 단순하지 않다. 텍스트 파일을 찾아서 열고,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파악하고, 고치고, 관련된 다른 파일도 같이 고쳐야 할 수 있다. DB라면 레코드 하나 수정하면 끝인데. 특히 같은 내용이 KO/EN 양쪽에 있으면 두 곳을 다 고쳐야 한다.
AI가 맥락을 잃으면 엉뚱하게 수정한다. 대화가 새 세션으로 시작되면 AI는 이전 작업의 맥락을 모른다. 진입점 파일(series-map.md, _index.md)을 읽으면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하지만, 이전에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서 관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위키가 옆에 있어서 그나마 버티는 거다.
결국 이 구조가 가능하게 한 것
DB 없이 텍스트만으로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건, AI가 블로그 전체를 하나의 파일 시스템으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글을 쓰고, 번역하고, 연결하고, 현황을 파악하고, 다음에 뭘 써야 하는지 제안하는 것 — 전부 AI가 한다. 나는 방향을 잡고, 내용을 검수하고, 발행 결정을 한다.
이게 1인 개발자한테 맞는 블로그 운영 방식이다.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도구를 설계하고, 그 도구를 AI가 운용하는 구조.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만 내가 있으면 되는 구조.